탄소중립 기조 아래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보일러를 대체할 설비로 히트펌프가 주목받고 있지만 보편화 단계로 나아가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가정용의 경우 국내 대부분이 공동주택 형태인데다 규제가 겹겹이 쌓여있어 보급이 제한적이고, 산업용은 활용 잠재력은 크지만 정부 지원책이 부족하다. 또한 설치 비용이 비싸 보조금 지원에만 의존하는 정책의 지속 가능성에도 물음표가 달린다.
이에 본지는 히트펌프가 말뿐인 속도전을 넘어 탄소 배출 감축에 기여할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공기열 히트펌프는 어디서든 쓸 수 있잖아요. 이거는 전력 사용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반드시 (보급을) 해야 하는 일인데, (보급에) 속도를 내야할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7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히트펌프에 관한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설명을 듣고 이같이 말하며 히트펌프 보급 속도전에 힘을 실었다.
김 장관은 당시 회의에서 “올해 가정용 히트펌프를 제주도·남해안 지역에서 보급을 시작했고, 내년부터는 신축 아파트에도 가스배관 없이 히트펌프 도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기후부는 지난해 2035년까지 전국에 히트펌프를 총 350만대 보급한다는 목표를 내세운 바 있다. 기후부는 보급 목표를 달성하면 2029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62만톤을 감축하고 2035년까지는 456만톤을 추가로 줄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난방 부문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예고한 히트펌프 보급 총력전은 많은 난관을 마주하고 있다. 특히 가정용 히트펌프의 경우 국내 주택 형태 및 구조를 무시한 채 오로지 보급 확대에만 초점을 맞춘 정책이 나오고 있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기후부는 지난해 12월 '히트펌프 보급 활성화 방안'을 내놓은 이후 올해 내내 공동주택이나 상업용 건물 등 다중이용건물 또는 대형 건물에도 히트펌프를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개선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가시화된 성과는 지난 4월 공공·상업시설에 대한 비전기 난방시설 의무 설치 규정을 폐지한 것이다.
히트펌프는 가열된 물·공기·땅에서 열을 흡수해 난방하거나 주변 기온보다 낮은 물·공기·땅을 냉매처럼 이용해 열을 빼내는 식으로 냉난방을 하는 장치다. 압축기와 팽창 밸브 등을 돌리는 데 필요한 전기를 재생에너지로 만들면 탄소 배출 없이 냉난방이 가능하다.
기후부는 히트펌프 업계를 대상으로 지난해 말 정책 발표 전후로 의견을 수렴했고, 올해 5월 추가로 의견을 취합했다. 아울러 지난 7월 김성환 기후부 장관이 주관한 '열혁신포럼' 행사에서도 업계와 전문가 의견을 받았다.
문제는 가정용 히트펌프의 경우 국내 주택의 80%를 차지하는 공동주택에 적용하기에는 규제가 너무 많고 주택구조와도 맞지 않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주택법과 건축법의 하위 규정에서는 공동주택의 경우 가스공급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으며, 중앙집중난방이 아닌 개별난방의 경우에는 사실상 가스보일러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를 적용받지 않는 건물은 △장기공공임대주택 △세대별 전용면적 50㎡ 이하 △세대 내 가스사용시설 미설치 지역 등으로 매우 제한적이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주택 약 2018만 호 가운데 아파트는 65.8%(1329만 호), 연립·다세대는 14.3%(285만 호)로 공동주택 비중이 80.1%이며, 단독주택 비중은 19.9%(383만 호)에 불과하다. 공동주택에 히트펌프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주택법과 건축법 및 하위 규정을 모두 바꿔야 한다.
설비와 하중 문제도 있다. 가정용 히트펌프의 무게는 본체만 90~150kg이고, 축열기와 태양광 발전설비 등 기타 필수 장치까지 고려하면 더 나간다. 특히 축열기는 에너지 저장 규모와 단열 자재 두께 때문에 무게가 100kg를 거뜬히 넘고, 물까지 채우면 무게는 더 나가며, 높이도 2m에 가깝다. 현재 설계 기준으로는 공동주택 설계 하중이 약 203.94kg/㎡이고, 보일러실에는 폭 0.5m 이상의 환기구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어 이를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기후부는 올해 말까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연구용역을 통해 공동주택에 대한 전기설비와 장비, 설계하중 등을 히트펌프에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이 같은 내용은 국토교통부와 협의를 거쳐야 해 기후부만의 의지로 개정이 어렵다. 국토부 입장에서는 히트펌프 보급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건축물 안전성과 공사 과정 같은 내용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후부 관계자는 “히트펌프 적용 확대에 대한 방향성에는 기후부와 국토부 모두 공감하고 있다"면서도 “실제 적용 여부에 대해서는 하나 하나 따져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실제 보급이 녹록지 않음을 에둘러 설명했다.
현재 법적 제한 없이 히트펌프를 설치할 수 있는 주택은 단독주택이다. 이에 올해 히트펌프 설치 보조금 사업도 단독주택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정부는 올해 제주와 경남, 전남 지역의 단독주택을 대상으로 히트펌프 총 설치비 1400만원 가운데 보조금으로 70%를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내년에는 전국을 대상으로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예산당국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공조시스템 업계에서는 히트펌프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선 기존 건축물 난방 관련 규제를 빠르게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업계 한 전문가는 “가스 대신 전기로 난방을 해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차원에서 히트펌프를 확대해야 한다는 정책 방향은 맞다"면서도 “한국 주택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파트와 연립주택에서 히트펌프를 설치하기 어렵다면 특히 수도권 보급에 힘이 실리기 어려워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