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4일 산업용 전기요금만 킬로와트시(kWh)당 평균 16.9원(9.7%) 인상하기로 했지만 업계에서는 적자해소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기업들의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에서 가정용 전기요금 수준이 산업용 전기요금보다 낮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주택용은 제외하고 산업용만 올리고 있어 '시장원칙이 작동하는 전력시장'을 만들겠다는 현 정부 출범 당시의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요금체계를 더욱 왜곡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이번에도 산업용 요금만 인상한 것은 대통령 지지율이 낮은 상황에서 주택용을 올릴 경우 여론이 더욱 악화될 것을 고려한 결정으로 풀이하고 있다.
정연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한전 입장에서야 적자를 어느 정도 줄이는데 기여할 수 있겠지만 요금설계 원칙상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며 “특히 작년, 재작년에도 산업용만 올렸다. 원가회수율이 낮은 주택용을 억지로 올리지 않으면 현재의 왜곡된 요금체계를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산업계 관계자는 “산업용이 여론 반발이 적으니 손쉽게 계속 올리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와 공기업의 실책을 산업계에 떠넘기는 조치이며 기업경쟁력을 저해하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전력업계에서도 산업용 전기판매량에 이번 인상폭을 적용해도 한전의 구조적인 재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운 만큼 가정용과 일반용 등 다른 요금들도 정상화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산업용 올려도 연간 재무개선 효과 4.5조 수준…누적적자 40조 해소에 역부족
한전 전력통계월보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산업용 전력판매량은 19만2199기가와트시(GWh)를 기록했다. 12개월로 추산하면 약 30만GWh로 가정하고 여기에 kWh당 인상분 16.9원을 적용하면 연간 4.5조원 수준의 한전 재무개선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누적 적자 40조원의 8% 수준에 불과하다. 누적적자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인 셈이다.
국내 에너지 대용량 사용자는 대부분 철강과 자동차 분야 등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대기업들로 전기요금이 높아지면 이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요금 인상으로 전력을 많이 쓰는 철강·자동차·전자 등 주력산업 대기업 등의 전기요금 부담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번 산업용 인상은 국내 일각은 물론 미국 등 해외에서도 한국 정부가 산업계에 값싼 전기요금으로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에 대응하는 차원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계에서는 이번 요금 인상과 관련해 정책 실패에 따른 비용을 기업에 떠넘긴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2022년 정부는 한전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사채 발행액을 '자본금 및 적립금을 합한 금액의 2배 이하'로 설정한 한전공사법을 '5배 이하'로 늘렸다. 그마저도 한도가 임박해가자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으로 고비를 넘기겠다는 방침인 셈이다.
산업계는 이 같은 정부의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추진을 두고 “경기 침체로 경영 환경이 암울한데 또 다른 부담"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전기요금 인상으로 피해가 우려되는 업종은 철강, 반도체 및 가전, 배터리 업종 등이 대표적이다. 고철을 전기로에서 녹여 쇳물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전기로 제강사인 현대제철은 연간 전기료만 6000여억원에 이른다. 삼성전자의 경우 연간 1조원이 넘는 전기요금을 내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원가 회수율을 고려하면 산업용 전기는 가정용·농업용 전기에 비해 싸게 공급받는 게 아니다. 또한 고압의 전기를 송변전 과정 없이 대량으로 구매하는 우량 고객"이라며 “경기 침체로 철강, 반도체 등 수요가 줄어든 상황에서 전기요금이 인상되면 경영에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업계 “산업용이 원가 회수율 가장 높아…다른 사용자들에게도 가격 신호 줘야"
한전이 홈페이지에 공시한 '전기요금 원가 정보'에 따르면 2022년 전기요금 총괄원가 회수율(총수입/총괄 원가)은 64.2%로 관련 통계가 집계되는 2005년 이후 가장 낮았다. 일정량의 전기를 1000원에 사서 642원에 팔았다는 의미로, 한전은 전기를 팔 때마다 358원의 손해를 본 셈이다.
특히 산업용 전기 원가 회수율은 70% 수준이지만 농사용과 가정용 전기의 원가회수율은 25% 수준으로 알려져 다른 용도의 전기요금 체계의 개선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된다.
또한 한전에 따르면 OECD 국가 전체의 평균을 100이라고 할 때, 한국의 주택용 전기요금은 54, 산업용 전기요금은 66 정도로 주택용 전기요금이 더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산업용 외에 전반적으로 전기요금에 원가가 반영되지 않아 에너지가격의 변동에 대한 국내 전력소비자들의 노출 빈도를 상대적으로 매우 낮게 만들고 이는 결국 전력소비자들이 요금 변동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정연제 교수는 “생산원가가 반영되지 않은 왜곡된 요금 정보는 국가적 측면으로 보면 비효율적 소비를 유도하게 된다. 전력소비를 줄여야 하는 시기에 전력소비를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며, 전력보다 다른 에너지 가격이 저렴한 시기에는 대체 가능한 다른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 소비임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가격정보로 인해 지속적으로 전력을 소비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정부의 이같은 전기요금 제도 개편 추진은 고물가 상황에서 일괄적으로 적용받는 전기요금을 큰 폭으로 올릴 수 없고 이 경우 늘어나는 한전의 적자해소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고민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