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변화가 농업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하면 대부분 가뭄과 폭염으로 농작물이 말라 죽거나 수확량이 감소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최근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들은 또 다른 위험을 경고한다.
앞으로 인류가 맞게 될 위기는 식량이 부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풍성해 보여도 영양은 줄어드는 '속 빈 강정' 같은 식량이 늘어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콩은 여전히 열리고, 밀은 여전히 자라고, 젖소도 우유를 계속 생산한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단백질과 비타민, 미네랄, 유지방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즉 양은 유지되거나 늘어나도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식량안보의 개념이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서 '얼마나 영양가 있는, 건강한 식품을 생산하느냐'로 바뀌어야 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다.
과학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숨겨진 굶주림(hidden hunger)'이다. 이는 칼로리는 충분히 섭취하지만 비타민과 미네랄, 단백질 등 필수 영양소가 부족한 상태를 의미한다.
현재도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이러한 미량 영양소 부족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후변화로 식품의 영양 밀도까지 낮아지면 빈혈, 면역력 저하, 성장장애, 인지기능 저하 등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특히 철분과 아연, 비타민 B군 부족은 임산부와 어린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비만과 영양결핍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른바 '이중 부담(double burden)' 현상도 더욱 심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밀, 수확은 괜찮아도 비타민은 최대 30% 감소
가장 충격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는 밀(유럽 겨울밀)에서 나왔다. 겨울밀은 가을에 파종해서 이듬해 초여름 수확하는 밀을 말한다.
벨기에 겐트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Advanced Science)'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래 기후 조건을 재현한 실험을 실시했다.
연구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밀 생산량은 오히려 증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영양가는 크게 떨어졌다. 비타민 B5(판토텐산)와 비타민 B6(피리독신)는 약 25~30% 감소했고, 필수 미네랄인 몰리브덴은 20% 이상 감소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현상을 '성장 관련 희석 효과(growth-associated dilution effect)'라고 설명했다.
기후변화와 높은 이산화탄소 농도에서는 식물이 더 빨리 자라고 생체량(biomass)도 늘어난다.
그러나 비타민과 미네랄이 축적되는 속도는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곡이 더 크고 풍성해 보여도 영양소는 오히려 희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밀이 '속 빈 강정'처럼 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셈이다. 비타민 B6는 식물의 키와 광합성 효율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까지 확인됐다.

◇콩, 생산량은 늘어도 단백질은 줄어든다
콩(대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브라질 상파울루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국제 식량 연구(Food Research International)'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질 경우 콩의 영양 성분이 크게 변한다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이산화탄소 증가는 광합성을 촉진해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양의 질이다.
연구에서는 콩의 단백질 함량이 약 6% 감소하고 전분은 20%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 이유는 '탄소-질소 희석 효과(carbon-nitrogen dilution effect)' 때문이다.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식물은 당분과 전분 같은 탄소 화합물을 빠르게 만들어낸다. 하지만 단백질의 핵심 원료인 질소를 흡수하고 동화하는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탄수화물은 늘어나지만 단백질 농도는 희석된다. 겉으로는 알찬 콩처럼 보여도 실제 영양은 줄어드는, '속 빈 강정'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유도 예외 아니다…생산량보다 성분이 먼저 변한다
기후변화의 영향은 축산물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코넬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환경 연구 회보(Environmental Research Letters)'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650만 마리 이상의 젖소 데이터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기존 상식을 뒤집었다. 폭염이 오면 우유 생산량부터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우유 성분이 먼저 나빠진다는 것이다.
젖소가 더위를 느끼기 시작하는 비교적 낮은 온습도지수 55(THI)부터 유지방과 유단백 함량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생산량 감소는 THI 70 이상에서 나타났지만, 성분 변화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폭염 환경에서는 유지방은 3.2%, 유단백은 5.9% 감소했다.
그 이유는 소의 생리적 적응 과정에 있다.
열 스트레스를 받은 소는 사료 섭취량이 감소하고 에너지 부족 상태에 빠진다. 그러면 몸은 우유의 지방과 단백질을 만드는 대신 체온 유지와 생존에 에너지를 우선 사용하도록 대사 체계를 바꾼다. 결국 우유의 양보다 영양 성분이 먼저 희생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성분 저하가 여름철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연중 지속될 수 있다. 우유 가격이 지방과 단백질 함량에 따라 결정되는 만큼 생산량 감소만 고려하면 실제 경제적 손실을 최소 두 배 이상 과소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우유가 계속 생산되지만, 그 속은 조금씩 비어가는 '속 빈 강정' 현상이 축산물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생산량 경쟁'이 아니라 '영양 경쟁'
과거 인류는 녹색혁명을 통해 굶주림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에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 앞으로의 문제는 곡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곡물 속 영양이 부족해지는 것일 수 있다.
이에 따라 기후위기가 심화할수록 농업 정책도 새로운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벨기에 겐트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네이처(Nature)'에 발표한 논문에서 기후변화가 인류의 영양소 공급 자체를 위협하고 있으며, 단순한 증산 정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이 제시하는 대안은 '바이오포티피케이션(biofortification·생물강화)'이다. 이는 육종이나 유전자 교정(CRISPR), 대사공학 등을 활용해 작물 자체의 비타민과 미네랄, 단백질 함량을 높이는 기술이다.
이미 철분과 아연이 풍부한 품종, 비타민 A가 강화된 황금쌀(golden rice), 엽산 강화 쌀, 비타민이 강화된 카사바 등이 개발되고 있다.
이처럼 기후위기가 현실이 되면 기후 적응성과 높은 영양가를 동시에 갖춘 품종 개발이 중요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