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전기요금은 이제 정치적 기회주의와 비효율성, 그리고 왜곡된 인센티브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한때 전력 생산과 송배전에 필요한 비용을 회수하는 단순한 구조였던 전기요금은 이제 여러 사회적, 정치적 목적을 해결하려는 만능 도구로 변질되었다. 이로 인해 전력 시장의 본질은 훼손되고 투자자들은 투자목적과 상관없는 비용부담을 떠안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전력 소비자들도 내가 뭐에 대해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불투명하고 정당하지 않은 비용 부담까지 안게 되었다.
몇일 전 KBS, EBS 공영방송의 수신료가 다시금 전기요금에 포함되게 되었다. 방송법 시행령 개정 이후 난산 끝에 분리징수가 작년에 결정 공시되었으나, 올해 다시 전기요금에 통합되게 된 것이다. 정말 (주)한국전력에게 별걸 다 짊어지게 한다는 생각이 안들 수 없다. 징수의 편의성 측면에서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겠지만, 사실 이는 본질적으로 전기요금의 근본 원칙을 무시하는 행위다. 당연히 공영방송의 재정 안정성을 무시해서가 아니고, 이들은 지원되어야 할 공적 가치가 있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전력 소비와 무관한 방송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얹어, 전기 소비자로 하여금 자신의 소비와는 관계없이 수신료까지 전기사용으로 인한 비용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또 다른 사례로서, 한전공대 운영비를 전기요금에서 충당하는 문제 역시 소비자로서 매우 심각하게 본다. 한전의 총괄원가는 한전이 전력 생산, 송배전, 관리, 기타 사업 활동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포함한 총액이다. 따라서 한전공대 운영비가 공익사업 비용으로 계상되면, 전력 공급 비용에 포함되어 총괄원가 반영되는데 이는 당연히 전기요금 책정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한전공대 운영비도 사실은 분리 공시를 해야한다. 전기요금에서 섞어버려 징수를 할 것이 아니라 KWH 당 얼마의 한전공대에 투입되는 비용이 소비자들에게 명백히 전가되는가를 계산해서, 아무리 작은 금액이라도 소비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기존에 전력산업에 대해 연구하는 많은 인력들이 각 대학 및 연구소에 산적해있는데도 한전공대의 운영을 전기 소비자들이 책임져야 한다면, 그 정보라도 공개되어야 할게 아닌가. 정치적인 이유로 (주)한국전력이 원치도 않은 출자출연을 하게 하니, 실제로 피해를 입는 것은 주식회사의 주주들이요 전기소비자도 편익과 관계없는 비용지출을 강요당한다.
이에 더해, 최근 일부 정치권에서 '연구개발용' 전기요금 체계 마련 추진 중인 것으로 안다. 기존 주택용, 일반용, 교육용, 산업용, 농사용 등으로 구분되어있던 요금체계에 연구개발용을 추가 신설해 이를 농사용 전기요금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발상이다. 물론 연구개발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기요금 갈라치기는 또다른 비효율을 초래한다. 연구개발 비용을 절감시켜주려면 다른 방식으로 해야지 왜 또 전기요금으로 지원하나. 누군가는 그 부담을 떠안아야 하고 세금은 걷기 힘드니, 전기 소비자들이 나눠 부담하라는 말 밖엔 안된다.
어디 그뿐인가. 사회 정책의 짐을 죄다 전기요금에 얹고 있다. 농어촌 지원, 저소득층 할인, 도서산간 지역 지원 등 다양한 사회적 목적을 수행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전력산업과 시장과는 관계없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전기요금에 포함시키는 방식은 전력산업의 비효율적을 가져오고, 기본적으로 불공평하다.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공영방송 지원, R&D, 농어촌 및 저소득층 지원, 교육사업 출자에 대한 가치평가를 절하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전기를 포함한 모든 상품 및 서비스 요금의 핵심 원칙은 비용과 편익의 반영이라는 기본이 자꾸 흐려지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들을 전기료에 붙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전기요금은 그냥 순수하게 다른 사회적인 목표가 아닌 전력 생산, 송배전, 그리고 환경 외부비용만이 그 포함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들도 본인들이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전기사용에 따른 기회비용을 온연하게 느낄 수 있다. 전기를 사용하며 내가 얼마나 많은 석탄과 천연가스 그리고 재생에너지 사용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지 느껴야 스스로 더 많은 양을 쓰거나 절약하는 등 경제논리에 따른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한국의 전기요금 체계는 누더기나 다름없어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정책 결정자들도 전기요금을 기타 별개의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영방송, 교육, 연구개발, 사회복지 등은 모두 중요한 덕목이지만, 전기요금과는 분리된 별도의 재정 구조를 통해 지원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방향은 공공 신뢰를 훼손하고 경제적 비효율성을 조장하며 재정 투명성을 해친다. 전기요금 체계를 본래의 역할로 되돌리고 소비자들에게 명확하고 공정한 요금을 부과해야 한다.
유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