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에너지는 무거운 핵이 가벼운 핵들로 분열하면서 질량 결손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이 열에너지를 이용해서 전기를 생산하는 형태로 활용한다. 대량의 석탄이나 가스를 태워서 고온을 만들어내는 대신 원자로를 사용하는 것인데, 비슷한 운전인력과 자본으로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 경제성이 더 좋기 때문에 종래에는 원전을 더 크게 설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주력모델인 APR1400(전력 1400메가와트 생산)은 그런 관점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형 원전 모델 중 하나이다. 반면에 300메가와트이하의 전력을 생산하는 소형 원자로는 상대적으로 경제성이 낮으니, 그동안은 러시아나 미국 등에서 잠수함과 항공모함 등 군사목적 선박이나 극지에서의 활용에 국한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최근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규격화되고 공장제작으로 생산되는 소형모듈형원전(SMR)이 현장에서 십여년에 걸쳐 건설되는 대형원전과 경제성으로도 경쟁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종래 대형원전에서는 안전설비를 강화하면서 비용이 계속 증가하였는데, SMR은 특유의 안전성 덕분에 주변에 방사선 비상대비구역조차 설정할 필요가 없게 되니 안전성은 물론이고 사회적 수용성도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탈탄소 에너지원 중에서 원하는 때에 원하는 출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원자력뿐이다. 풍력이나 태양광 에너지에서는 자연적으로 어쩔 수 없는 간헐성이 생기는데, SMR의 탁월한 출력조절력은 이런 간헐성을 보완해 주어 신재생에너지와 결합해서 사용하면 최상의 탈탄소 조합이 된다. 그러다 보니 지금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는 SMR의 바람이 거세다.
최근에 계속 보도된 것처럼 AI나 데이터센터를 운용하는 대량 전력 소비 기업이 원자력으로 생산한 에너지를 직구매하는 것은 비즈니스 연속성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탄소배출을 피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선택지이니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거대기업이 원자력을 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현존하는 발전소를 활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최근의 계약은 모두 SMR을 도입하는 계약이다. 국가나 주정부 차원에서도 원자력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많은 주정부들이 SMR,을 도입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고, 텍사스에서는 석탄화력발전소를 SMR로 전환하기 위한 조사도 진행되었다. 북유럽의 부국인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전기생산은 물론이고 지역난방을 저탄소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고자 SMR을 도입하고 있다. 유럽에서 새로운 SMR을 도입하고 있는 국가는 영국, 프랑스,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등 너무나 많아서 이제 SMR을 고려하고 있지 않은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러한 동향이 단지 개별 기업이나 국가 단위의 노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년 12월 두바이에서 개최된 유엔 COP28 기후변화회의에서 한국을 포함한 22개 국가 장관들은 2050년까지 전세계 원자력 발전용량의 3배 확대를 위한 선언문에 서명하면서 SMR과 첨단 원자로를 지원하고, 나아가 탈탄소화를 위한 원자력기반 수소 또는 인공합성연료 생산도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런 와중에 SMR을 만들어 공급하겠다는 회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이 설립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세계 각국이 에너지 안보에 촉각이 곤두선 상황에서, SMR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혁신형소형모듈원자로(i-SMR)라고 이름붙인 원자로를 2020년부터 개발해 왔다. 산업부와 과기부의 공동 지원 하에 원자력기업들, 원자력연구소, 학계가 팀 코리아를 이루어서 내년에 표준설계에 대한 규제기관의 인허가를 신청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한 서방세계의 3대 원전 강국 중 하나이다. 이 i-SMR에는 한수원과 원자력연구소에서 수십년간 개발해 온 많은 원자로의 경험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다. 최고의 운전이력을 보였고 우리나라에서 거의 매년 건설해 왔던 가압경수로 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무전원 피동안전기능을 대폭 강화한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실제 건설, 인허가, 운전에서 다른 신규노형보다 큰 강점이 있을 것이다. 특히 붕산을 사용하지 않는 혁신적인 안전개념 덕분에 원자력에서 가장 중요한 안전성에서도 미국과 여타 국가의 경쟁노형을 앞설 것으로 기대한다.
i-SMR로 결집된 팀 코리아의 노력이 제대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최신형 원자로를 개발하는 것 못지않게 이런 기술을 평가하고 감독할 수 있는 법체계와 규제체계의 개발도 중요하다. 규제가 제대로 안되는 원자력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니 이미 바짝 다가온 SMR의 시대를 리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원자력 시장은 각국의 총체적 경쟁의 장이면서 동시에 가장 냉정한 기술 경쟁의 장이다. 제대로 잘 만드는 팀만이 살아남아 새롭게 열리는 거대한 시장을 장악할 것이다. 체코원전 우선협상자 선정에 이은 또 한번의 팀 코리아의 활약을 기대한다.
강현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EE칼럼]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전환의 갈림길에서
2024.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