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북한의 파병설마저 불거지면서 파장이 크게 일고 있다. 그동안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긴 했지만, 직접적 개입을 피하면서 이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으려 해 왔다. 그런데 북한의 개입이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이 전쟁이 유럽의 안보와 동아시아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어 심히 우려스럽다. 더군다나 그 어느 때보다 접전일 것으로 예상되는 대선이 2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역시 난감한 눈치다. 북한에 더 단호해야 한다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분명 냉전 이후, 세계사에 큰 변곡점이 될 만한 일대 사건이다. 이 전쟁은 세계 최대의 핵무기 보유국이자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었기 때문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는 지위를 얻은 구 소련, 지금의 러시아가 유엔 헌장의 정신을 위배하고 주권 국가의 영토를 침범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국제 정세의 판을 뒤흔들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다가 지난 달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필요하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아 핵무기 사용 원칙 개정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유럽 남부의 최대 원자력 발전소인 자포리자 원전은 러시아의 통제 하에 놓이면서 전력 생산을 위한 시설이었던 원전이 폭탄이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해 왔던 유럽 국가들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녹색 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면서도 에너지 안보를 그 어느 때보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미 전쟁 전부터 가스로 유럽 국가들에게 지정학적 레버리지(지랫대)를 활용해 왔다. 예를 들어 독일에게는 적극적으로 가스를 공급해 왔던 반면, 미국의 미사일 방어 계획을 지지했었던 체코에게는 가스 공급을 중단하는 식의 방법으로 이른바 유럽 국가들을 '길들이기' 했던 것이다. 체코의 원전 확대 방침은 이런 쓰라린 경험에 의한 측면이 있으며, 한국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데에도 지정학적 판단이 작동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지난 달 말 한국을 찾은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피초 총리와 윤석열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에서 원자력 및 방산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된 것 역시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동유럽 국가들을 필두로 국방은 물론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전략적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으면서 기술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효율적인 원자로 건설을 제안할 수 있는 한국과 원자력 분야의 협력을 도모할 국가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수 있다. 이는 한국에게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깊이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 핵무장 지지 여론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사이에 발생하는 논리적인 충돌이다. 한국이 북한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 측면에서나, 기술적으로나, 재래식 전력 및 전반적인 국방력에 있어서나 월등히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사이에는 결국 '핵무기'라는 비대칭전력으로 인한 불균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핵 밖에는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왔다. 최근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지지하는 여론이 다시금 강화되고 있다.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무려 71.4%가 북한이 핵을 고수한다면 한국 역시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이는 확장 억제를 강화하고 한미 간 핵협의그룹(NCG: Nuclear Consultative Group)을 설치하기로 한 '워싱턴 선언' 등의 영향으로 다소 낮아졌던 추세가 다시 반등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물론 한국 국민들의 이러한 우려는 작금의 국제 정세를 돌아볼 때 이해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에라도 한국이 자체 핵무장의 길을 가게 될 때 그것이 가져올 국제적인 파장은 북한의 핵 야욕에 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북한이 2003년 마침내 탈퇴한 핵확산방지조약(NPT: Nonproliferation Treaty)은 불공평한 국제 조약이라는 비판이 여전히 있지만, 전 세계 존재하는 195개 국가 중 191개가 가입하고 있는 최대의 국제 조약이자 규범 체계다. 한국이 만약 핵무장의 길을 간다면 그 근간마저 흔들릴 수도 있다.
한국이 속한 아시아만 둘러보아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몽고는 '비핵지대(NWFZ: Nuclear-Weapon-Free Zones)를 선언하고 핵무기의 개발, 배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한국과 같이 안정적으로 원전을 운영하여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고 싶어 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한국이 핵무장의 길을 간다면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기후위기 시대의 필요한 흐름에서 한국은 도태되고 또 하나의 외로운 룰 브레이커(rule breaker)로 전락할 수도 있다. 원자력 에너지의 책임 있는 평화적 이용을 지지하면서도 핵무기와 핵 위협에는 단호히 저항한다는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할 때 한국을 지켜보고 있는 많은 신흥국가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질서 유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거듭 상기해야 하겠다.
임은정
[EE칼럼]기후변화 대응 막는 전력시장 경쟁 부재: 한전 자회사 재통합 논쟁
2024.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