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기후문제, 산업과 통상의 문제다

서왕진 건국대학교 겸임교수/ 에너지환경정책학 박사
2024-03-14 08:43:54 댓글 0
▲서왕진 건국대학교 겸임교수/ 에너지환경정책학 박사


최근 국내외 정세변화 양상을 보면 가히 대전환기적 상황이라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미·중 패권경쟁과 헤게모니 다극화 속에서 새로운 국제질서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예상치 않은 전쟁의 발발이나 동맹체제의 변경과 같은 외교 안보 질서의 변화도 크지만, 국제 산업통상 질서의 변동은 더 가파르다.

공급망 안정화와 일자리 창출이 맞물리며 그동안 글로벌 경제 질서를 지배한 자유시장 기반의 세계화가 퇴조하고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표현한 “국내중심경제학(Homeland Economics)의 시대"가 오는 듯하다. 국제적으로는 다양한 무역규제, 국내적으로는 국가 주도 산업 정책의 부활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강력하게 추동하는 요인 중 하나가 기후변화 대응을 목적으로 전 세계가 동시에 전개하고 있는 탈탄소 전환이다.

EU는 탄소국경조정(CBAM)을 통해 EU에 수출하는 타국의 상품에 대해 EU 수준의 탄소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방식으로 EU 기업들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메커니즘을 작동하고자 한다. 2023년부터 과도기를 거쳐 2026년 1월 1일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들고 나왔는데, 총 7370억달러 재원 중 4400억달러를 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대응 등 녹색산업에 투여,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기후 입법안으로 평가받는다. 이 정책은 미국 내에서 생산하는 탄소중립 관련 제품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자국 산업 보호나 해외 클린산업 유치를 추진하는 적나라한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이다.

민간의 자발적 캠페인인 RE100도 각국의 기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업 활동에 필요한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를 이용해 생산된 전기로 사용하겠다는 RE100은 애플, 구글, 3M 등 글로벌 기업 400여개가 참여하여 이 기업에 납품하는 각국의 수천개 기업들에게 재생에너지 사용을 강제하고 있다.

이러한 각국의 기후정책들은 탄소중립을 명분으로 자국 산업의 탈탄소 전환과 산업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글로벌 산업통상 질서와 연계되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우리 현실과 타국의 전략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제대로 된 탈탄소 전환 정책 및 산업 통상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국가경제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가 갈라파고스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국제적 추세와 동떨어진 정책을 펼치거나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재생에너지 생산 목표의 하향 조정과 원전 강화 정책이다. 지난 정부에서 2030년에 30.2%로 설정했던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목표를 21.6%로 하향 조정했다. 반면 원전 비중은 23.9%에서 32.8%로 높였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기업들의 RE100 대응이다. RE100은 비록 민간의 자발적 캠페인이지만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이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동참을 약속하고 실제로 부품과 소재를 조달하는 연관기업에도 RE100 준수를 요구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 기준이 되었다. 삼성, SK 등 우리의 핵심 기업들도 모두 참여하고 있다.

공급망 체계 안에 있는 국내 부품 및 소재 기업들도 이미 기준 준수를 요구받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이들에게 재생에너지를 충분하게 공급하는 것이다. 원전도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이니 괜찮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RE100에 원전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어버렸다.

RE100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서 이미 수출길이 막힌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위험성을 예견한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공급이 원활하고 여기에 더해 보조금까지 지원하는 미국 등으로 빠르게 이전하고 있는 현실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을 시행한 이후 1년간 외국 기업들의 대규모 대미 투자 계획 건수 중 한국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탄소중립의 실현과 기후위기 대응 관련 글로벌 산업통상 규제를 돌파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인 재생에너지의 획기적 증대를 위한 정책을 시급히 펴야 한다. 독일이 추진하고 있는 재생에너지 증대를 위한 초강력 정책패키지인 '부활절 패키지'와 같이 국가가 총력으로 정책드라이브를 걸어가는 시도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서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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