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 속 에너지정책도 혼돈에 빠졌다. 야당이 주장하는 RE100(기업생산에 사용하는 전기를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캠페인)과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던 CFE(재생에너지 외에 원전과 수소 등 무탄소 전원을 포함한 개념)를 두고 어느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둘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다만 두 개념 모두 정작 생산한 전기를 실어나르지 못하고 있는 송전망 부족 문제 해결 방안은 결여됐다.
정치권이 에너지 문제까지 지지층을 향한 구호로만 활용할 뿐 정작 여론에 민감한 송전망 확충이나 전기요금 정상화 등은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이유다.
제10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 따르면 재생에너지는 2030년까지 약 4.1GW 증가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2030년 재생에너지 출력 제어율은 19%로 상승 후 24~25%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송전망 확충, 정치권 요금인상 저지와 지역민원으로 진척 없어
한전의 추산에 따르면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 수요 충당을 위해서는 2050년까지 현재에 비해 2.3배 규모의 전력망 구축이 필요하다. 송전망 건설,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망 업그레이드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정부는 지난해 5월 제10차 장기송변전설비계획을 통해 지난해 대비 2036년까지 송전선로는 1.6배, 변전소는 1.4배 확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한전 추산에 따르면 이 투자비는 약 56조5000억원 규모이다. 하지만 이 비용을 어떻게 부담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답보 상태다.
전국 각지에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민원이 많다 보니 독점 송전 사업자인 한전이 약속한 기한 내 완공하지 못하는 상황도 이어지고 있다. 김한규 국회의원은 최근 본지와 국회에서 개최한 'AI시대, 우리의 전력산업과 시장은 준비가 되었는가?' 세미나 토론에서 “여당이나 야당이나 재생에너지와 AI, 데이터센터 확대 등에 따라 송전망을 확충하고 전기요금도 인상해야 하는 걸 알고 있지만 표를 의식해 추진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송전망 확충이 없으면 에너지원을 막론하고 발전기를 아무리 늘려도 무용지물이다. 실제 송전망 부족 문제는 원자력, 석탄화력, 재생에너지 등 에너지원을 막론한 전력시장의 최대 난제다. 늘어나는 발전설비를 감당하지 못해 발전소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한국전력거래소에 따르면 2012~2022년 동안 우리나라 발전설비는 8만1806MW에서 13만8018MW로 69%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송전선로는 3만676km에서 3만4944km로 14% 확충에 그쳤다.
특히 전북, 전남 등 특정 지역에 집중된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는 태생적으로 간헐성과 불확실성이 커 충분한 용량과 유연성을 확보한 송전망 확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수년째 지역주민의 반대 민원과 한전의 적자 문제 등으로 적기 보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체 전력망 안정성을 이유로 빈번하게 발전소 가동을 강제로 차단하는 '출력 제어'가 발생하고 있다.
최근 준공된 동해안의 석탄화력발전소도 기존 원자력발전소가 많은 상황에서 계획대로 송전망이 확충되지 않아 절반 정도만 가동되고 있다. 송전망 부족과 이로 인한 출력 제어 사태는 에너지원을 가리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에너지업계 한 관계자는 “원자력이나 재생에너지를 대폭 늘리는 게 문제가 아니다. 물론 누구든지 재산권이 있고 자연경관도 해치기 때문에 송전설비를 좋아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며 “지중화와 충분한 보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이를 담당해야 하는 한전은 대규모 적자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정부와 한전이 수행하지 못할 경우 민간에라도 맡기는 등 정치권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 중심 RE100, 원전·석탄보다 더 많은 송전망 필요
현재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태양광발전의 경우 원자력과 석탄 등 기저발전원에 비해 가동률이 현저히 낮다. 이 때문에 같은 양의 전기를 수요처로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송전설비가 요구된다. 특히 재생에너지는 날씨 등 기후 환경에 의존하기 때문에 생산량 조절이 어려워 전력이 과잉 생산되거나 공급이 중단될 수 있다.
석탄화력이나 원자력은 이용률이 80% 이상으로 24시간 꾸준히 발전과 송전이 가능하지만, 태양광은 기후 등 여러 제약으로 가동 시간이 들쭉날쭉해 이용률이 15%대에 불과하다. 단순 계산해 같은 양의 전기를 나르기 위해서는 기저발전원보다 6배 많은 송전선로가 필요한 것으로 분석된다.
송전선로가 확보된다 해도 전기는 생산과 동시에 소비되어야 하는 특성을 갖는다. 재생에너지가 전기를 생산하는 순간마다 이를 다 수도권에 보냈을 때 받아줄 수요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태양광 발전기에서 생산된 잉여 전력을 에너지저장장치(ESS)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일정하게 송전하는 방식이 현실적이지만, 이 또한 비용이 문제다.
탄소중립위원회 에너지분과 전문위 의견 검토에 따르면,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비율을 61.9%까지 확대할 경우 태양광 500GW와 ESS를 구축하는 데 최소 787조원에서 최대 1248조원이 소요된다는 분석도 있다.
이와 관련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은 “탄소중립을 위해 '원자력발전을 많이 해야 한다', '재생에너지를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논쟁이 한창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산된 전기를 실어 나를 '송전망 확충'"이라며 “기업들이 무탄소 전기를 잘 쓸 수 있도록 하고, 수출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추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일각선 수요분산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
송전망 확충이 단기간에 어렵다면 수도권에만 집중되고 있는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에너지 사용 시설을 지방으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성규 한국전력공사 재생에너지대책실장은 “반도체 단지, 데이터센터 등 첨단산업관련 전력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수도권에 집중되는 반면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호남지역 등 비수도권으로 집중되고 있다"며 “이는 결국 비수도권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으로 수송할 대규모 송전선로의 지속적인 확대가 필요하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어 “민원과 지자체 인허가의 비협조로 송전망 건설은 장기간 지연되고 있다"며 “아무리 보상해줘도 송전망 주변 주민들 요구를 충족해줄 수 없다. 반도체나 데이터센터는 계속 수도권에 들어가고 있다. 결국은 수요의 분산이 이뤄지지 않으면 공장을 지어도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실장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전력계통 여건을 우선 고려해 전력수요를 계통 여유지역으로 유도하기 위한 '전력계통영향평가' 제도를 통해 지역별 전력수요와 공급의 분산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